중산(中山)분재원

분재와 함께 살아가는 기쁨

분재/분재 이야기

[스크랩] ■ 소나무 분재 1호의 추억

중산(中山) 2011. 8. 7. 12:25

■ 소나무 분재 1호의 추억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 소나무 보호정책을 철저하고 강하게 펼쳤다.

궁궐이나 관재, 병선을 만드는 선재 등 국가가 필요로 하는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서 좋은 형질의 소나무 서식지를 엄선해 엄격하게 관리 했다. 소나무라는 이름은 나무 중에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수리”라고 부르다가 “술”로 바뀌었고, 오늘날의 “솔”로 변했다 한다. 소나무는 나무 전체 모든 부분이 골고루 쓸모 있다. 뿌리, 줄기, 잎, 꽃가루, 솔 씨, 송진 등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둥치는 목재로 잎과 꽃가루는 차와 식재로, 속껍질 송구는 구황재로, 뿌리에서 기생하는 복령은 약재로 쓰인다. 최고의 귀한 식품으로 대접 받는 송이버섯도 소나무가 아니면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무 중 우두머리라 여겼으며 우리나라 환경에도 잘 어울려 잘 자랐기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라 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분재 취미에 있어서도 화목류나 실물류, 잡목류는 계절 따라 변함을 기려 키우지만 송백류, 특히 소나무는 계절에 따라 변화는 적지만 적게는 수십년 길게는 수백년 오랜 기간 자자손손 분에 담아 연륜미를 보태며 기를 수 있으니 그것이 매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재취미는 처음에는 꽃을 보기 위한 화목류로 부터 시작 하여 그 다음에 열매를 다는 실물류, 그러다가 나목(한수)을 보기위한  잡목류를 좋아하다  맨 나중에 송백류를 좋아 하게 되는것이 분재 취미가들의 일반적인 과정으로 소나무 분재는 그만큼 깊은 재미가 있다. 


내가 분재를 취미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일생의 큰 행운이었다.

1965년 일본인 친구 요시노와 팬팔로 연구 논문과 교육에 관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자연히 취미에 관한 예기도 오갔다. 요시노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소했던 분재가 취미였고 특히 왜 철쭉 수백분을 수집하여 기르면서 해마다 가장먼저 피는 꽃을 따 압화로 만들어  그 꽃에 얽힌 사연과 함께 분재에 관심을 가져 보라며 분재에 관한자료도 같이 보내 주었다.

그의 덕택으로 나도 이런 저런 나무를 몇구루 분에담아 분재로 길러 보리라는 생각으로 가장먼저 시도한 제 1호가 이 소나무 이다.

1967년 2월 말 당시에는 나무 한포기 없는 뒷산 잔솔밭에서 화분까지 들고 가 화분 크기에 알맞은 포기를 찾아내어 제 흙으로 정성스레 심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보시고는 소나무를 화분에 심어 살릴 수는 없으니 아까운 나무를 공연히 죽게 한다며 며칠 뒤 밭에다 옮겨 심어셨다.

요시노가 보내준 사진이랑 자료를 보이며 살릴 자신이 있다고 고집을 부려 다시 화분으로, 아버님은 다시 밭으로, 이러기를 수차례, 결국 아버님 왈 “네가 그 나무 살리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는 말씀과 함께 밭으로 옮겨 심는 것을 그만 두셨다.

그런 연유가 있었기에 반드시 살려내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듯이 정성이 통하였던지 봄이 되니 눈이 자라나기 시작 하였다.

그때만 해도 분재 화분을 구할 수 없어서 토분을 낫게 자르거나 장독 뚜껑이나 수반에 구멍을 뚫어 나무를 심었다. 그런 그것이 42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내 손에서 자라면서 많은 흉터가 아물고 가지가 불어나고 둥치가 커지면서 노수의 자태를 갖추었으니 그 동안의 동고동락의 정을 무엇이라고 표현 할 적당한 말이 없다.

 

    나의 분재 제1호 

    1967년 2월에 화분에 담고, 이듬 해인 1968년 11월 20일의 모습,

    수령 약15년, 키 30센티, 뿌리 부분에 상처가 많았다,

 

   1973년 봄 처음 수형을 잡아보다.

   철사 걸이를 할 줄 몰라 철사로 가지를 끌어당겨 잡아 맨 상태

 

  1979년 11월 18일

 

  1984년 10월

 

 

 1991년 10월 6일 

 

 

 

  2010년 1월 현재의모습 키 ; 47Cm, 직경 20Cm

 

  뿌리의 힘찬 모습

 

출처 : 차 향이 있는 풍경
글쓴이 : 허수아비 원글보기
메모 :